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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하고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장수, 가야의 중심으로 솟아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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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가야

jangsu cultural heritage

백두대간을 품은 장수 가야, 국가의 위상을 갖추다

  • 4세기 말엽 경, 장수군에 지역적 기반을 두었던 마한 세력은 새롭게 가야 문화를 받아들이고 가야의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다. 백두대간 서쪽의 유일한 가야 소국, 장수 가야는 이렇게 역사 속에 등장했고, 6세기 중엽 경 백제와 신라에 의해 멸망 당할 때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 장수·장계 분지에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을 남겼고, 국방력의 산실인 산성과 봉화망을 구축하였다. 장수군을 비롯한 전북특별자치도 동부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200여 곳의 철산지가 그 발전의 원동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최근 장수 가야의 수장층 무덤에서 철기를 제작하는 망치와 모루 등 단야구(鍛冶具)세트가 출토되어 자체적인 철기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었다. 더 나아가 장수 가야인들의 무덤에서는 신라·백제를 비롯한 영남지역 가야 소국의 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는 장수 가야가 철을 매개로 주변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성장·발전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장수지역 가야고분 위치도

ex) 장수지역 가야고분 위치도

장수가야 지배자들의 영혼이 잠든, 백화산 고분군

장수군 장계면의 주산인 백화산(848.5m)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세 갈래의 산줄기 정상을 따라 12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남아있다. 백두대간과 백화산을 배후에 두고, 그 앞쪽에는 금강의 최상류인 유천과 장계천이 흐르며 주변에는 넓은 충적 대지가 펼쳐져 있다. 이로 인해, 장계 분지 내 어느 곳에서든 백화산의 고분군의 위용이 드러난다. 장수군 삼봉리·장계리·호덕리 고분군을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이를 하나로 합쳐 ‘백화산 고분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개별 고총의 평면 형태는 대체로 장타원형이며, 지면을 다지고 그 위에 흙을 먼저 쌓은 다음, 이를 다시 파내서 매장 시설을 마련하였다. 매장 시설은 수혈식 석곽묘(돌덧널무덤)이며, 그 길이가 5m를 훌쩍 넘는 것들도 확인된다. 다른 지역의 가야 무덤과는 다르게 봉토의 주변에 호석(護石,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으로 두르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백화산 고분군1
백화산 고분군2

장수 가야의 첫 국가 사적, 동촌리 고분군

장수군 장수읍의 주산인 마봉산(724.6m)에서 서북쪽으로 장수읍 소재지까지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의 정상부를 따라 9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남아 있다. 고총의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봉토의 주변에 호석(護石, 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을 두르지 않았다. 그 구조와 형태, 조성 방법이 장계분지에 있는 백화산 고분군과 유사해 동일한 집단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대 이후 시작된 꾸준한 발굴조사를 통해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 토제품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장수 가야인들의 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동촌리 19호분에서 우리나라 가야 고총에서는 최초로 편자(말발굽)가 출토되었고, 28호분에서 금동제 화살통 장식을 비롯하여 은제 귀걸이, 말 재갈과 띠고리 등 동촌리 고분에 묻힌 사람들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최고급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중요성이 학계에 인정되어 2019년 장수군 최초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등촌리 고분군

ex) 동촌리 고분군

장수 가야 국방의 초석, 봉화

봉수(烽燧)와 봉화(烽火)는 변방의 급박한 군사적 정보를 중앙으로 알리던 통신수단이다. 산봉우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고, 불과 연기를 피워 신호를 주고 받았다. 최근 장수군을 비롯한 전북특별자치도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120여 곳의 삼국시대 봉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봉화들은 대략 8개의 노선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진안·무주·임실·순창·완주군 동북부와 충남 금산군에서 시작하여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으로 이어진다. 최근 몇몇 봉화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가야 또는 삼국시대 유물만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도 그 가능성을 더욱 높여 준다.

봉화

ex) 봉화

호남지역 최초로 확인된 가야 봉화, 장수 영취산 봉화

장수 영취산(1,075m)은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의 분기점이자, 금강과 섬진강, 남강 수계를 갈라놓는 분수령이다. 남원 운봉고원의 덕치리 봉화를 시작으로 한 갈래의 봉화로가 백두대간 정상부를 따라 북쪽으로 이어져 장계 분지로 연결되는데, 영취산 봉화는 이 봉화로 상에 위치한다. 석축 봉화대는 자연암반을 다듬고, 이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거친 석재를 활용하여 길이 8m, 폭 5m 내외의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은 흙과 잡석을 채운 구조이다.

영취산 봉화

ex) 영취산 봉화

가야 석축 봉화대의 전형, 오성리 봉화봉 봉화

금남호남정맥의 고봉인 팔공산(1,149.3m)에서 갈라진 천황지맥에 봉화봉 봉화가 위치한다. 봉화봉 정상부를 평탄하게 다듬고, 한 변의 길이가 8m 내외인 방형 봉화대가 축조되었다. 봉화대의 상면에서 불을 피웠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거친 돌을 원형으로 돌려 쌓은 형태이며, 그 안쪽에서 숯이 검출되었다. 봉화대가 있는 정상부의 남쪽과 북쪽에 마련된 평탄지에서는 봉화군이 머물렀던 주거 공간이 확인되었고, 여기에서 불을 피울 때 사용했던 부싯돌과 토기 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장수 오성리 봉화봉 봉화는 그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봉화의 운영과 관련된 주거 공간이 함께 발견되어 고대 봉화의 구조 및 형태, 운영체계 등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어 2022년 6월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오성리 봉화봉 봉화

ex) 오성리 봉화봉 봉화

장수가야의 요새, 삼봉리 산성

장수 가야의 지배자 무덤군으로 알려진 백화산 고분군의 배후에 삼봉리 산성이 있다. 산봉우리를 감싸도록 성벽을 둘렀는데, 그 둘레가 300m 내외이다. 전체적으로 타원형에 가깝지만, 동북쪽이 돌출된 특이한 형태이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량의 가야 토기가 출토되었고, 정상부에서 가야 봉화의 흔적이 발견됨에 따라 삼봉리 산성은 장수 가야 중앙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북쪽 평탄지에서 가야가 멸망한 이후, 신라에 의해 조성된 집수시설(물을 모아 가둬놓은 시설)이 확인되었고, 통일신라시대 화장묘와 후백제의 건물지 흔적이 확인되어 가야 멸망 이후, 장수군의 역사성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봉리 산성
철광석 산지에 자리 잡은, 장수 가야

‘철을 가진 자 세상을 지배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고대 사회에서의 철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자, 권력의 상징과 같았다. 장수군 관내에서 확인된 제철유적만 70여 군데가 넘고, 전북특별자치도 동부지역으로 그 범위를 넓히면 220여 곳의 제철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최근 장수 가야의 수장층 무덤들에서 최고급 철기 유물이 출토되는가 하면, 철기를 제작할 때 쓰이는 단야구 세트가 확인되어, 장수 가야인들이 철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철광석 산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제철유적, 장수 대적골 제철유적

장수군의 동쪽을 감싸는 백두대간의 고봉 중 남덕유산(1,507m) 서쪽에 ‘대적골’이라 불리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대략 1.5㎞의 범위에 걸쳐 대규모 제철유적이 남아있다. 곳곳에 광석에서 철을 추출하고 남은 불순물인 슬래그가 산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제련로(製鍊爐)에 넣기 위해 잘게 부서진 철광석들도 쉽게 확인된다.

그동안 다섯 차례의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제련로와 건물지 등이 조사됐고 철솥을 제작하던 거푸집도 확인되어, 철광석의 채취에서부터 제련, 정련, 가공까지의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었다.

대적골 제철유적

ex) 대적골 제철유적

장수군,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다.

5세기 무렵부터 6세기 중엽 경까지 백두대간의 품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장수지역의 가야 세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6세기 중엽 이후, 거대한 가야 고총이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백제 유물이 급증한다거나 백제와 신라의 산성이 축조되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즈음 백제 또는 신라에 의해 복속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장수 침령산성과 삼봉리 산성에서는 신라에 의해 축조된 성벽과 집수시설이 발견되었고, 다량의 신라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는 백제뿐 아니라, 신라 역시 장수지역으로 진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호남과 영남을 이어주는 문물교류의 허브이자, 백제와 신라의 군사적 완충지대, 대규모 철산지였던 장수에 가야가 멸망하자 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각축 양상이 전개된 것이다.

침령산성

ex) 침령산성